오산일보

아내의 묘비명

이서인 기자 | 기사입력 2024/10/11 [10:24]

아내의 묘비명

이서인 기자 | 입력 : 2024/10/11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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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석영 회장 현)대한언론인회 회장 한국문학신문 대표

100년 전쟁 때 영국의 태자였던 에드워드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지나가는 이여! 나를 기억하라, 지금 그대가 살아있듯이 한때는 나 또한 살아있었노라. 내가 지금 잠들어 있듯이 그대 또한 반드시 잠들리라~ ” 어느 성직자의 묘지 입구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라고 적어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유럽을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BC336~BC323)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나를 땅에 묻을 때 손을 땅 밖으로 내 놓아라” 천하를 손에 쥐었던 알렉산더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갔다는 것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유명한 헨리 8세의 딸로서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훌륭한 정치수완을 발휘해 영국 왕정을 반석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 역시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말을 남겼다.“ 오직 한 순간 동안만 나의 것이었던 그 모든 것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수 십 년 동안 규칙적으로 산책했다. 사람들은 그가 산책하는 것을 보고 시간을 짐작했다고 한다. 그랬던 칸트도 임종이 가까워지자 침대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하인은 칸트가 목이 마를까봐 설탕물에 포도주를 타서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먹였다. 어느 날 칸트가 더는 그것을 마시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이제 그만” 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칸트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오래 전에 가진 세계문학 선호도 조사결과에 따르면 50~60대가 꼽은 1위 작품은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건네는 ‘자유와 해방’의 목소리가 좋았나 보다. 그의 뜻은 묘비명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몇 년 전 시애틀타임스는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여성 작가 제인 로터의 부고를 실었는데 이 부고를 쓴 사람은 바로 작가 자신이었다. 그녀는 “삶이란 선물을 받았고, 이제 그 선물을 돌려주려 한다”면서 남편에게 쓴 유언에 “당신을 만난 날은 내 생애 가장 운 좋은 날이었다”고 전했다. 죽음 앞에서 의연하고, 살아있는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이 감동을 준다.

 

중국의 동산 선사는 살아있을 때는 철저하게 삶에 충실하고, 죽을 때는 철저하게 죽음에 충실하라고 가르쳤다. 그가 죽기 전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인생은 멋진 여행이었다. 다음 생은 어떤 여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밖에도 많은 묘비명이 있지만 제일 충격적인 것은 버나드 쇼 (1856~1950)의 묘비명이다. 그는 1950년 사망할 때까지 극작가, 평론가, 사회운동가 등의 폭 넓은 활동을 하면서 1925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무용가 이사도라 덩킨이 ‘저와 같이 뛰어난 용모의 여자와 당신처럼 뛰어난 자질의 남자가 결혼해 2세를 낳으면 훌륭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며 구혼의 편지를 보내오자 버나드 쇼는 “나처럼 못 생긴 용모에 당신처럼 멍청한 아기가 태어날 수도 있지 않겠소?”라며 거절했다.

 

이렇게 오만함과 익살스러움으로 명성을 떨쳤던 버나드 쇼는 94세까지 장수하며 자기의 소신대로 살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묘비명이 ‘충격적’이었다. “내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그는 동서양에 걸쳐 명성을 떨치고 의미 있는 삶을 살다간 문인이요, 철학자며, 노벨상까지 받은 인물이다. 이런 사람이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며, 우물쭈물했다고 자평한 것이다. 그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았다고 후회했을까?

 

한 여름 무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가을의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아내가 소천한지도 보름 가까이 됐다. 세월은 이처럼 유수같이 흘러간다. 앞으로 나한테 남은 시간은 더 빨리 지나갈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들은 자신이 사후에 어떻게 기억됐으면 하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오늘 가족들과 아내의 묘비명에 대해 논의했다. 그 결과 생전에 아내가 말해왔던 성경구절을 묘비에 새겨 넣기로 했다. 시편 23편 6절 말씀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 하리로다” 이 구절을 가지고 이번 토요일 아들과 함께 아내를 만나러 가서 보고할 참이다. 아마 아내도 좋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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