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일보

오산 궐리사 전설과 문화유산

이서인 기자 | 기사입력 2024/02/19 [10:08]

오산 궐리사 전설과 문화유산

이서인 기자 | 입력 : 2024/02/1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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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한준 <필자 : 조선일보 정년,시인, 저술가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오산시 궐리1동의 문화재 궐리사(闕里祠)는 경기도 기념물 제147호로 지정된 공자 사당(孔子祠堂)이다.

 

흔히 궐리사를 사찰로 혼동하는데, 공자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궐리는 본래 공자가 자랐던 노나라 곡부(曲阜)의 마을 이름이다. 지금은 중국 산둥성 태안시 취푸 현의 궐리를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궐리사가 오산과 논산 두 곳에 있다. 오산 궐리사는 공자의 후손들이 건립했고, 논산 궐리사는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의 제자들이 세웠다.

 

 

오산 궐리사는 조선시대 문신이자 공자의 64대 손인 공서린(孔瑞麟· 1483∼1541)이 공자 영정을 모시고, 후학 육성을 위해 세운 곳이다.

 

해마다 지방 유림들이 모여 봄·가을로 사당 제사를 지냈다. 공서린은 조선 제11대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참의,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그는 후학을 지도할 때 공자가 그랬던 것처럼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 놓고 치면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깨우쳤는데, 그가 죽자 은행나무도 말라죽었다고 전한다.

 

 

공(孔)씨가 오산에 정착한 때는 고려 제30대 충정왕 3년(1351)이라고 한다. 공자의 53대손인 공소(孔紹)가 원나라 한림학사로 있을 때,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결혼한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귀화하여 오산에 정착했다고 알려졌다.

 

공자의 가르침인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공자 후손들에 대해 많은 배려를 했다.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공자의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으니 그 자손은 성예(聖裔)로서 은전을 받아야 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이후 역대 왕들도 공 씨의 후손들을 관직에 등용하고 사소한 죄는 형벌을 면하게 했으며 잡역을 시키지 않았다고 전한다.

 

오산 궐리사에 얽힌 또 다른 전설도 흥미롭다. 공서린은 경기도와 황해도 관찰사와 대사헌을 역임했지만, 기묘사화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뒤 오산으로 낙향해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조선 제22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묘소인 융릉으로 참배 갔을 때 많은 새들이 모여들어 활개를 짓는지라, 괴이하게 여겨 그곳을 가보니 죽었던 은행나무에 새싹이 돋아나는 것이었다. 이 마을의 사연을 전해들은 정조는 공자의 사당을 세우도록 한 뒤, ‘궐리사’라는 친필 편액을 하사했다. 마을 이름도 공자의 고향을 그대로 본떠 궐리로 바꾸고, 공씨(孔氏) 문중에 곡부(曲阜)라는 본관(本貫)을 쓰도록 했다.

 

조선 제26대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들을 강제로 없애버리는 ‘서원철폐령’을 내릴 때 궐리사도 없어졌다가 1900년 다시 세우고 1981년 강당을 세웠으며, 1993년 중국 산동성에서 기증받은 공자의 석고상을 모셨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동쪽으로는 학문을 배우는 공간인 강당 건물이 있고, 서편에 사당이 있어 동학서묘(東學西廟)의 전형적인 서원 건축 양식을 보이는 문화재이다.

 

 

오산시의 산세(山勢)는 오산천을 경계로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서 두 줄기가 부드럽게 이어진다. 6‧25전쟁 초기에 유엔군과 공산군의 첫 전투지였던 오산 죽미령 초전 참전비가 있는 북오산 나들목 반월봉 줄기를 타고 완만하게 흘러내린다. 오산 시민들이 즐겨 찾는 등산로 주변, 예로부터 학문의 땅으로 지명된 고장에 자리 잡은 동학서묘(東學西廟)의 궐리사, 오산시가 교육도시로 이름 높은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문화재는 조상의 삶과 얼, 선대들의 애국 애족 정신과 이념이 함께 담겨 있다. 그래서 민족문화유산으로 소중하게 보존하고 가꾸면서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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