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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사람사는 이야기② 이발 문화를 아시나요:오산일보

오산일보

[인터뷰] 사람사는 이야기② 이발 문화를 아시나요

김정수 | 기사입력 2024/01/01 [01:02]

[인터뷰] 사람사는 이야기② 이발 문화를 아시나요

김정수 | 입력 : 2024/01/01 [01:02]

 

사람사는 이야기는 평범한 일상속 시민의 소리를 담아, 삶의 애환이 담긴 시간속 스토리를 들어보는 시간을 같습니다. 오산일보가 사람들을 만나 온라인과 지면을 통해 다양한 사연속 내용을 전하는 코너입니다. 애독자 여러분의 지지와 성원 그리고 많은 제보를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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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복 이발사가 44년째 운영중인 자신의 이발소에서 사진인증을 하고 있다.(사진=오산일보DB)    ©이서인 기자

 


이발문화를 아시나요

 

한때는 이발문화가 성업하던 시절이 있었다.

동네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이발소의 삼색등은 18세기 무렵까지 서양의 이발과 면도 외에 나쁜 피를 뽑아내는 등 간단한 의료행위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삼색의 빨강, 파랑, 하얀 색은 동맥, 정맥, 붕대를 각각 의미하는 뜻에서 이발사가 전문적인 의료기술을 지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삼색표시등의 의미는 그렇게 존재했었다. 이발문화는 1901년 인사동의 동흥 이발소를 시작으로 미용 외 지역사회 사교장으로 까지도 깊숙이 자리잡던 우리 삶의 문화가 전해지기도 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발소는 현대장비들을 갖춘 일명 바버샾, 이용관(이발소의 다른명칭)을 제외하고 점점수가 줄어들며 이제는 추억의 장소로 변모해 간다.

<편집자 주>

 

방문서비스와 함께 지역에서 44년간 이발소를 운영하는 유성복씨를 만나 이발문화에 대한 스토리를 들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유 이발사의 일정표를 보면 매달 찾아가는 방문서비스 케어가 눈에 띈다.

 

경상도 출신으로 일찌감치 상경한 유 이발사는 경기 오산시에서 44년간 터를 닦으며 자리를 잡았다.

 

유성복 이발사를 만나 시간속 사연을 담은 방문서비스의 케어가 무엇인지 궁금증을 풀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은 유성복 이발사와의 일문일답이다.

 

◆ 이발사가 된 계기

 

제가 자랐던 어린시절에는 마을 어귀에 동네이발소가 한곳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엔 환경이 녹록치 않던 시대라서 어린아이들 머리엔 ’이‘가 많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저희 부모님은 머리를 손질할 시기가 되면 꼭 짧은 스포츠머리로 깍아 오라곤 하셨습니다.요즘은 군대나 가야 할 시기에 깍는 짧은 헤어스타일이죠 일명 바리깡기계로 머리를 밀고 나면 삐쭉삐쭉 삐쳐 나온 머리카락의 잔가지들을 가위 하나로 연마하기 시작하는 이발사의 모습들이 정겨워 보이기도 했고, 차츰 정리되는 잔가지들의 모습들이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시절엔 남성들은 대부분 이발소를 찾던 시절이었죠. 그렇게 어린시절 자주 찾던 이발소에서 보고 느끼던 가위질의 손기술이 부러웠고, 어려운 형편에 부모님을 일찍 여윈 저와 형은 서로의지하며 살다가 형이 월남전 파견근무로 전출되면서 혼자남게 된 저는 돈을 벌기위해 이발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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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지난 12월 13일 오산시 신장동사무소에 마련된 장소에서 어르신들에 이발봉사를 하는 모습이다.(사진=오산일보=DB)     ©이서인 기자

 


◆ 44년간 이발소를 운영하면서 잊지 못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약 30년 전만 해도 이발소의 환경은 여성분들이 면도를 많이 해주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엔 이발소에서 머리를 손질하는 것 뿐만아니라, 턱수염 콧털 등 면도기를 사용하여 이발소를 이용하는 고객에게 별도의 비용을 받고 면도케어를 하던 시절이죠 요즘도 면도를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객층이 줄어든 요즘과는 비교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처음 찾아온 손님인데 면도까지 끝내고는 그 사이 잠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손님이 잠을 자다가 잠꼬대를 하면서 이발소 바닥으로 떨어졌던 사건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청소를 하려고 준비해놓았던 물통을 건드리면서 이발소 바닥이 물난리를 겪었던 기억이 있습니다.바닥에 떨어진 손님은 무사했지만 손님옷이 물에 젖으면서 한 바탕 소동은 지금에 와 추억이 되었습니다.

 

 

◆ 이발소를 운영하면서 가장 힘든점은 무엇인가요

 

건전한 이발문화로 변천해야 할 남성들의 쉼터가 퇴폐 이발소가 아니냐는 말을 들을때가 가장힘듭니다. 퇴폐이발소가 성행하던 시절도 있었죠 여성들이 면도를 하던 시절에는 합법과 퇴폐를 오가며 영업하는 퇴폐이발문화때문에 건전한 순수 머리만 깍는 이발소는 오해아닌 오해와 간혹 술에 취한 손님들이 찾아 들면서 곤혹도 여럿치뤘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해로 남았던 분위기로 학부모들은 이발소가 아닌 미용실로 아이들을 보내면서 손님은 급격히 줄어든 원인도 한 몫합니다. 과거 오산시 관내 등록된 이발소는 총 65개 소였는데, 지금은 35개소로 줄어들었습니다. 반면 미용실은 200곳 이상이 오산시 관내서 영업중이죠. 손님은 줄고있는데 가게세는 점점 올라가는 것이 불편하지요. 그래서 비싼지역보다는 외곽 이나 변두리에 이발소가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 미용실과 비교해서 이발소만의 특징이 있다면

 

미용실에 비해 요금이 많이 저렴하고요, 우리는 바리깡보다 주로 특별한 가위기술로 자르고 머리숱도 정리합니다. 그리고 면도도 칼을이용해서 해드릴 수 있습니다. 미용실에선 칼을 사용 하는 것이 공중위생관련볍령에 의해 불법으로 규정되고 있는 부분의 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 방문서비스 케어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30여 년 전부터 시작된 봉사가 지금은 재능기부로 자리잡았습니다. 매달 정해진 요일에 정해진 동사무소를 찾아 지역의 독거노인 등 기초수급자에 제가 가지고 있는 손 기술을 제공한다고 말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저의 어린시절 지금은 추억으로 남는 부모님의 잔소리와 머리를 손질할 때마다 떠 오르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모두 제 보모와 같은 분들입니다. 처음 봉사 할 때만 해도 부모님 같은 분들께 약간의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봉사가 어르신들이 고맙다며 손잡아주시고, 안아주시고, 고구마도 삶아오시고, 간식을 전해주시던 표정들에서 부모님의 정을 느끼곤 했습니다. 지역의 소외된 분들을 생각하며 저의 재능을 얼마든지 제공 할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개선되길 바라는 점이 있다면

 

오산시 관내 협회모임에 이용사분들이 적극적 참여하여서 같이 의견나누고 단합했으면 합니다, 저희 오산시는 다른 수원시나 화성시에비해 이용료가 넘 저렴한데 10년째 그대로입니다.인터뷰 해주셔서 오산일보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2024년 갑진년 새해 댁내에 만복과 함께 가정에 만사형통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유성복 이발사 경력

 

1979년~현재(44년)

1998년 7월 09일 벨기에브르쉘 C-A-T 세계대회 한국대표 대상 수상

1998년 10월 05일 일본 이.미용 선수권대회 심사위원

전)이.미용 국제 기술위원

전)울산 이.미용학원 대표(10년)

전)C-A-T한국대회 심사위원

현)한국 국제 이.미용 기술대회 회장단

현)오산 유성이용원 대표

현)한국산업인력공단 이용사 시험 감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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